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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 2012-10-28 19:24:00 | ||
또 기습을 당하면 조국이 위험합니다. | |||
6.25 전쟁 때는 6.25전쟁의 “10대 불가사의”가 있었습니다. 이 “10대 불가사의”는 6.25 정전직후 육군참모 총장을 역임한 이형근 대장의 “군번 1번의 외길 인생”이란 자서전에 나오는 말로서 그중 다섯 가지만 약술합니다. 1. 일선부대의 남침징후보고를 군 수뇌부에서 묵살 내지 무시 2. 6월 11일부터 발령되어있던 비상 경계령을 6월 24일 00시에 해제 3. 비상경계령 해제와 함께 전 장병의 1/2에게 휴가 외출외박을 허용 4. 6월 24일 저녁에 개최된 육군 장교 클럽에서의 고급장교 땐스 파티 5. 6월 25-27일간의 국군후퇴를 반격, 북진 중으로 허위 보도한 중앙방송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4.3위원회)의 국방부 위촉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왜곡된 진상조사보고서의 채택에 대한 항의로 4.3위원을 사퇴한 필자의 눈에는 이와 유사한 불가사가 오늘날에도 일어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천안함이 격침되고 연평도가 포격을 당해도 전쟁 도발자를 두둔하는 일부 정치인과 언론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기까지엔 건국된 후 지난 60여년에,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6.25전쟁의 폐허위에 보리고개를 넘기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룩한 것은 온 국민들이 각자의 길에서 최선을 다했던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이었습니다. 이 성공을 어느 한 세대 혹은 세력의 전유물로 주장할 수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건국 이전부터 대한민국 탄생을 부정했던 북한 세습독재 왕조의 적화통일 음모에 맞서야했으며 그 과정에 생명으로 나라를 지켜 낸 국군용사와 경찰이 있었고 산업화의 역군과 자유 민주 투사가 있었고 그리고 가정과 직장에서 충실했던 애국시민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국군과 산업화역군, 자유 민주투사와 애국시민들은 모두 각자의 본분에 충실함으로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룩할 수 있었기에 서로는 서로를 인정하며 감사할 대상이지 결코 적대시할 수 있는 상호비방의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불행한 것은 모르는 사이에 4.3사건은 물론 5.18 그리고 베트남 참전 후에도 우리 국군을 양민 학살범으로 몰아가는 불순한 선전과 선동이 고개를 들었고 지난 10여년의 김, 노 정부시절을 넘기면서 심각한 수준에 이른 것을 느끼며 놀라게 됩니다. 이 형근 대장은 “군번 1번의 외길 인생”에서 언젠가 누군가가 6.25전쟁 “10대 불가사의”의 의혹을 풀 것이며 이것이 풀려야만 국가의 백년대계가 보장될 것이란 말씀을 남겼지만 4.3사건의 배후와 배경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저의 짧은 시야에는 이 불가사의의 규명을 위한 특별한 노력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고마운 것은 북한이 6.25 당시의 대남공작 실체를 스스로 인정하고 찬양하는 특별보도(1997.5.26일)를 함으로서 이 의혹을 풀어 준 것입니다. 필자는 4.3위원 사퇴 4년 후인 2007년 10월에 한 북한 전문가로부터 이 특별보도의 내용을 처음 알게 되면서 이 사실의 시급한 전파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나름의 노력을 해 왔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6.25전쟁도 북침이며 1.21 청와대 기습과 KAL기 폭파도 모두 대한민국의 자작극으로 오리발을 내밀던 북한이 1997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남공작의 규모와 실체를 대대적으로 찬양하며 공식인정했다는 것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더더욱 불가사의한 것은 1997년 5월 26일 이후에 있었던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에서 김 노 두 전직 대통령은 북이 공식인정한 대남공작의 중단요구나 조건제시도 없이 화해와 협력만을 약속하고 돌아와서는 전선지역에서의 대북확성기 방송조차도 모두 중단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대통령 김대중은 이 특집보도 내용을 모르고 6.15정상회담에 임했던 것이며 대통령 노무현은 이 내용을 알고도 “국가 보안법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자”고 했던 것입니까? 당시의 두 분 대통령을 보좌했던 국가정보 기관장들은 엄청난 직무유기를 했던 것이며 우리의 주요 언론들조차 오늘까지 14년을 계속하여 이 사실에 침묵하면서 우리들의 안보의식은 무너질 대로 무너졌던 것입니다.(참조: www.rokfv.com 인강칼럼 #10번 글, 김, 노 전임 대통령에게 따져 물어야 할 것-애국시민과 현역의 국군장병과 경찰에 고함) 성시백을 알아야 문제의 심각성이 보입니다. 1997년의 특집보도에 “민족의 영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열사”로 소개되는 성시백은 18세 때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모택동 심복으로서 상해 임시정부시절, 장개석 정부의 ‘수도경비사령관’에 해당되는 胡宗南 장군의 참모로 활약했으며, 서울복귀 후에는 장개석 총통 휘하의 참모였다는 소문으로 조선 경비대의 요인들을 조석으로 만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합니다. (참조: 상해 임시정부시절 독립군으로 활동했던 태윤기 변호사 선생의 “피어린 독립군의 항쟁수기, 回想의 黃河” 갑인출판사 1975년 발행) 기무사 제공 참고자료에 의하면 김일성은 해방 후 대남공작의 적임자를 물색 중, 중국 공산당에서 활동하던 성시백이 조선 사람임을 알고 주은래에게 인편을 보내 “성시백을 우리에게 보내주어 조선혁명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하자 주은래가 그를 조선 공작조직에 인계했다고 하며 북한공작원 임무를 부여받은 성시백은 일본을 거쳐 서울에 들어와 대북무역회사 대표로 위장하여 공작활동을 하다가 1950년 5월에 피검되어 6.25발발 이 틀 후인 6월 27일에 간첩죄로 처형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김일성장군님의 특사다” 소제목기사의 일부 “성시백 동지는 조직이 꾸려지고 공작 거점들이 도처에 마련되자, 먼저 선전 공작에 힘을 넣었다. 그는 를 창간한데 이어 를 비롯한 10여종이나 되는 신문들을 경영하여 선전공작에 리용하였다. 그는 서울 한복판에서만 아니라 보란듯이 영어, 중어, 프랑스어로 된 화보과 을 발행하여 국제우편을 통하여 세계 여러 나라들에 배포함으로써 경애하는 수령님의 위대성을 해외에까지 널리 선전하였으며 분렬주의자들의 매국적 죄행을 만천하에 고발하였다. 성시백 동지는 그 어떤 새로운 공작을 시작할 때나 사업을 전개해 나갈 때마다 김일성 장군님의 특사인 나에게는 수행 못할 그 어떤 임무란 있을 수 없다 하군 생각하였다.” “성시백 동지가 통일전선 공작을 벌리던 시초에 있은 일이었다. 남조선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중간세력을 쟁취하는 문제는 통일혁명을 승리적으로 전진시켜 나가는데서 매우 중요한 문제로 제기 되었다. 미제와 그 주구들은 어떻게 하나 중간세력을 저들 편으로 돌려 세우기 위해 온갖 책동을 다하고 있었다. 성시백 동지는 이에 대처하여 중간 정당, 단체들을 반미 자주통일을 위한 통일전선 대오에 결속시키기 위한 사업에 모를 박았다. 그는 당시 남조선의 중간 정당, 단체들 가운데서 제일 영향력이 강한 근로 인민당을 비롯한 5개 정당을 포섭하기 위한 데 힘을 돌려 4개 정당을 통일전선에 합류시키게 되었다.” 이와 같은 대남공작 공로로 성시백은 “인민 공화국 영웅 1호”의 칭호를 부여받았던 것이며 김일성이가 직접 이름을 지어준 그의 3남 성자립은 2007년 10월엔 김일성대학 총장으로 재직 중이었습니다. (경찰대학 유동열 박사) 국군은 제주 4.3사건과 5.18 희생자들의 적일 수가 없습니다. 국가에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전평시를 막론하고 억울한 희생을 당한 국민의 명예는 회복되고 필요한 경우 보상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상을 받게 되는 희생자와 유가족들이 국군과 경찰을 그들의 적으로 삼게 된다면 대한민국은 존재가치와 정통성을 자동으로 상실하는 것이며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전복하려는 북한의 대남공작 물결은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4.3사건과 5.18의 희생자와 유가족들이 그들의 희생배경에 북한의 선전과 선동이 있었고 대남공작에 속아 넘어갈 수도 있었다는 가능성에 눈만 뜬다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파괴하려는 북한의 대남공작은 효과적으로 차단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애국시민들이 더 늦기 전에 다시 상기해야 할 것은 김영삼 정부 시절에 1명, 김대중 정부 시절에 63명의 북한 간첩(비전향 장기수)들이 아무런 조건 없이 북송되었던 사실입니다. 이들 64명의 북한 간첩이 북에 올라가서 모두 성시백의 뒤를 잇는 인민공화국 영웅이 됨으로서 암약하던 남파 간첩들의 사기는 하늘로 솟았고 이들을 체포 수색 구금했던 대한민국 대공수사 요원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진 가운데 지난 10여 년간 4.3사건을 비롯한 각종 과거사 위원회의 활동이 국민들의 관심밖에 놓이게 되면서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이 양민학살의 주범으로 몰리는 기막힌 현상이 발생되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북한의 세습독재 왕조는 전쟁과 폭력 혹은 선전과 선동으로 대한민국 체제를 전복하여 프로레타리아 혁명을 완수하는 것을 지상목표로 삼기에 최근의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전후에도 여러 형태의 불가사의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이제 내년으로 닥아 온 총선과 대선이야말로 선전선동의 호기임으로 대한민국 정치인들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공작에 말리지 않도록 최대의 경계가 요망되는 것입니다. 불가사의 기습의 예방을 위해 북한의 핵 위협보다 훨씬 무서운 것은 대남공작입니다. 여야의 정당들이 공작에 눈감고 엉켜 싸우다가는 모두 공멸하며 대한민국도 망국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군대는 불가사의 기습에 속수무책이면 패전으로 갑니다. 6.25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 날 발생하는 불가사의 배경에는 제2, 제 3의 성시백이 활동하고 있다는 가능성에 온 국민이 눈을 떠야만 대한민국이 튼튼히 지켜질 것입니다.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직함과 공작금으로 신문과 방송도 장악도 시도할 것이기에 이미 늦었지만 14년이 지나고 있는 1997년 5월 26일의 노동신문 특집보도가 원문 그대로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지금도 시급하다고 판단되어 오늘 또 반복되는 글을 쓰고 말았습니다. (참조:rokfv.com 인강칼럼 헤드라인 “10년 전의 노동신문 특집보도 전문” ) 이 특집보도 내용만 온 사회에 전파되면 대한민국의 국군과 경찰은 국민의 큰 사랑을 받게 되고 4.3사건과 5.18 희생자들의 적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확인됨으로서 대한민국 국방은 반석위에 놓이게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2011.4.22. 00: 30 (예)육소장 한광덕 www.rokfv.com 인강칼럼 경남 진해 老兵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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